제주 새별오름에서 마라톤?

신체적자유

제주 새별오름에서 마라톤?

먹돌세상 2024. 4. 14.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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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4월 14일 06:55
집을 나와 새별오름으로 차를 몰았다. 오늘 새별오름 둘레와 정상을 뛰는 오름 마라톤이 있는 날이다. 08:00쯤 도착하니 행사장에 선수들이 하나 둘 보인다. 새 신발로 추정되는 형광색 계열의 운동화를 신고 있는 자들이다. 다들 결연한 눈빛으로 몸 풀기에 전념하고 있었다.

사실 오늘 대회는 일반대회가 아니라 클럽 소속의 선수들이 릴레이 형식으로 순위를 다투는 단체전 경기를 한다. 마니아들만의 모임이다. 그래서 그냥 선수는 없다. 다들 진심이다.

이들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건데 몸을 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있다. 대회 참가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함도 있지만 자신과 경쟁을 벌이는 선수들의 몸상태를 체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 보던 사이에 검게 그을린 피부랑 몸이 더 홀쭉해져 있으면 운동을 쉬지 않고 했음을 직감한다. 그래서 마라톤 하는 사람에게 "너 왜 이렇게 빠졌나?"라고 물으면 운동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기뻐하기도 한다.

여자선수들 또한 이러한 훑기에 들어간다. 남자선수들이랑 달리 단순한 인사 같은 언어를 넘어 몸을 통한 스킨십으로 상대의 연습량을 확인한다. 확인방법이 남자보다 더 완벽하다.

새별오름에서의 마라톤은 매해 개최 된다. 올해가 11회째다.
단체전은 총 8명의 남, 여선수들이 3.1km의 같은 코스를 총 8회 반복하여 달린다.
개인전은 오름 정상을 찍고 오는 약 5km의 코스를 달린다.
대회를 왜 새별오름에서 개최하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넓은 주차장과 정상에서의 전망, 그리고 평화로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것 같다.


새별오름에서 매년 정월대보름을 맞아 들불축제를 열었었지만 올해는 열리지 않았다.
산불위험과 생명체 훼손 우려를 반영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은 다시 열리기를 희망하고 있고 봉성리 마을주민들은 들불축제가 제주도 정식 행사로 지정하기 위한 조례안을 청구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들불축제는 1997년부터 시작된 역사 있는 지역축제이고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우수축제로 지정된 성공한 축제라 생각한다. 생태계 훼손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하여 이어졌으면 한다.

10분 후면 단체전 1 주자가 출발 예정이다.
엄청 긴장된다. 다른 선수들도 긴장을 하고 있는 듯하다.
말을 많이 하는 선수, 계속 움직이는 선수, 그냥 멍 때리는 선수 모두 긴장하고 있다.
나는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선글라스를 썼다. 한결 편하다.

선수들은 각자 전략을 세우고 있다.
서브 3(42.195km를 3시간 미만으로 완주) 고수들은 초심자들에게 전략을 계속 얘기하고 있지만 '쇠귀에 경 읽기'다. 공부든 운동이든 직접경험뿐이다.

나의 오늘 전략은 없다. 그냥 숨차게 달리되 오버페이스로 다리 힘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유지하는 것이다.

5,4,3,2,1, 출발
첫 주자 출발이다. 나는 네 번째 주자다. 긴장이 고조된다. 화장실을 바로 전 다녀왔지만 또 마렵다. 목도 탄다. 던져진 주사위는 땅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 이젠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냥 가는 수밖에

첫 주자 1위로 골인하며 2번 주자에게 인계, 첫 주자인 '제주울트라'(닉네임) 형님 입가에 거품이 보였다. 이런 고수도 이렇게 뛰어야 하는데! 갑자기 멘탈이 흔들린다.

2번 주자도 1위로 골인 3번 주자에게 인계!

본부석에서 4번 주자들 모이라고 한다. 드디어 드러나는 4번 주자들! 나와 같이 뛸 선수들이다. 이런~ 모두에게 고수의 냄새가 났다 선글라스부터, 운동화, 슬리브까지 하고 있었다.

3번 주자 '폴짝'님이 2위와 격차를 압도적으로 벌리며 나에게 바통을 넘기는 순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없다. 지금부터는 내 의지나 생각으로 달리는 게 아니다. 그냥 달려야 하기에 달리는 거다.

반환점을 돌면서 마주 오는 2위 선수와 마주쳤다. 그는 나를 의식하는지 힐끗 쳐다보는 듯하며 지나갔다. 빠르다. 왠지 예감이 안 좋다. 갑자기 없던 전략이 생겼다. 선두를 내어주더라도 격차만 좁히며 따라가기로 했다.

두 번째 오르막에서 결국 잡혔다.
그는 나를 추월한 후 두 팔을 벌린 채 선두의 공기를 만끽하는 모션을 취했다.
"젠장! 나를 두 번 죽이는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지금은 실력이 전부인 상황이다.

죽기 살기로 쫓아갔지만 그의 스피드는 후반으로 갈수록 더 빨랐다.
격차는 약 100미터였고 나는 결국 2위로 다음 주자인 '런폴"형님에게 바통을 넘겼다.

결국 마지막 8번 주자까지 2위를 유지하며 달리게 되었고 우리 런너스클럽은 2위를 했다.

내 능력치에 맞게 달렸다. 조금 더 잘 달렸으면 좋았겠지만 내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훈련이 안된 상태에서 좋은 기록을 바라는 것은 마라톤 정신에 절대적으로 반하는 거다

내년 대회에 클럽에서 다시 불러준다면 나는 뛸 생각이다.
그냥 달리는 게 좋고 클럽 회원들과 어울리는 게 좋다. 다만 다시 불러줄지는 모를 일이다.

대회 마치고 출근하는 차 안에서 와이프 연락이 왔다.
사실 오늘 와이프 배드민턴 시합이 있어 응원을 갔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러너님! 잘 달리셨나요?" 약간은 빈정대는 말투였다.
"응! 1위로 이어받고 2위로 넘겼는데 다들 그만하면 잘했다고 했어! 그래서 기분 좋음요"라고 대답하니

와이프의 짧은 한마디
"어이구 잘했네! 이젠 민폐 끼치지 말고 하나라도 잘하려고 해요!"

그 하나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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